영국의 식민지, 설탕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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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식민지, 설탕법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북아메리카의 13개 주 식민지 주민들은 과도한 세금과 부당한 정책에 반발하여 독립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조지 워싱턴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식민지군은 강대해지는 영국의 세력을 꺾으려는 연합군과 힘을 합하여 혁명을 승리로 이끌고 비로소 미국이라는 지금의 초인류 국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본론으로 돌아가 영국은 1588년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물리치고 해상 강국의 자리에 우뚝 솟아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계 여러곳의 신대륙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미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남아메리카를 침략하여 식민지를 세우고 금과 은등의 광물을 실어 나르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버지니아 회사와 프리머스 회사에 권한을 줘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세우도록 했습니다. 1607년 권한을 받은 버지니아 회사는 100여 명의 나자를 모아 북아메리카 동부에 있는 지금의 버지니아 지역에 제임스타움이라는 마을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제임스타운은 당시 왕이었던 제임스 1세의 이름을 딴 곳으로 부자가 되리라는 부푼 희망을 안고 신대륙을 찾은 그들에게 낯선 환경에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제임스타운사람들은 말라리아 같은 전염병에 쉽게 노출되어 있으며 이러한 전염병에 걸려 목숨을 잃었으며 겨울동안 추위와 부족한 식량으로 그 수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봄이 되자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며 농토를 넓혀 갔습니다. 다행히 땅이 기름져서 농사가 잘 되었습니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초기의 식민지 주민들은 원주민인 인디언들과 물물교환을 통해 식량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인이언은 이들에게 아메리카에서 잘 자라는 농작물과 재배법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특히 제임스타운 사람들은 인디언들에게 배운 담배 농사법으로 담배를 재배해 유럽에 갖다 팔기도 하였습니다.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제임스타운은 차츰 자리를 잡아 갔습니다. 1620년 제임스 1세가 청교도를 탄압하자 이를 피해 메이플라워호에 몸을 실은 102명 청교도들이 영국을 떠나 북아메리카로 향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범이 될 만한 신의 국가를 신세계에 건설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배가 상륙하기 전에 메이플라워 서약을 만들어 자기들 스스로 규칙을 정하고 굳게 지켜 나갈 것을 맹세하였습니다. 청교도들은 대서양 연안의 플리머스에 정착하여 인디언에게 옥수수, 콩, 감자 등을 재배하는 방법과 고기 잡는 법을 배웠습니다. 농사가 잘 되지 않는 척박한 땅이라 고기잡이나 모피 장사 등으로 터전을 넓혀 나갔습니다.

 

영국의 식민지, 설탕법


그리고 이듬해 가을에 첫 농작물을 거두고 신께 감사드리는 축제에 자신들에게 도움을 준 인디언들을 초대하여 곡식과 과일, 칠면조 요리를 대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추수감사절이 되겠습니다. 플리머스의 소식을 듣고 청교도들과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앞다투어 아메리카로 건너왔습니다. 이들은 플리머스 북쪽에 위치한 보스턴을 중심으로 매사추세츠에 식민지를 세웠습니다. 메사추세츠에서는 해마다 선거를 통해 대표와 관리를 뽑았습니다. 단, 남자와 청교도에게만 선거권을 줬습니다. 이에 반발한 사람들은 남쪽으로 내려가 로드아일랜드라는 식민지를 세웠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동북북 해안을 따라 여러 식민지가 하나씩 세워져 나갔습니다. 18세기 초반에는 대륙의 동부해안을 따라 13개의 식민지가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1763년 영국은 식민지를 놓고 프랑스와 벌인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에 식민지 사람들도 자신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뛰어들었습니다. 조지 워싱턴도 버지니아 민병대를 이끌며 영국군과 함께 싸웠습니다. 전쟁에 승리한 영국은 북아메리카 넓은 땅을 차지하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기나긴 전쟁으로 엄청난 빚을 진 신세가 되었습니다. 한편 동부에 자리잡은 13개 식민지는 인구도 많이 늘고 부지런히 일한 덕분에 경제적으로 넉넉해졌습니다. 영국은 이런 식민지에서 세금을 거둬 부족한 재정을 메울 계획을 세웠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불과 5년 사이에 영국은 무려 9개나 되는 법을 만들어 식민지에 짐을 떠안기려 했습니다.  1764년 영국은 설탕법을 만들었습니다. 설탕법은 프랑스나 네덜란드의 식민지에서 보스턴으로 들어오는 설탕과 포도주 커피 등에 세금을 매기도록 한 법입니다. 설탕을 넣어 제품을 만드는 업자들이나 상인들이 법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듬해에는 서류나 책 등에 붙이는 인지를 사도록 하는 인지세법도 만들어졌습니다. 식민지 사람들은 말도 안되는 항목을 만들어 세금을 뜯어 가려는 영국 정부에 반발하였습니다. 식민지 주민들은 1215년 영국의 대헌장에 유래한 대표 없이 과세는 없다. 라는 원칙을 영국 정부를 향해 외쳤습니다. 자신들의대표가 참석하지 않은 영국 의회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한 세금 정수에 동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당시 식민지 의회에서 패트릭 헨리가 영국의 인지세법에 반대하는 연설을 하였습니다. 헨리 연설은 식민지 사람들에게 큰 힘을 발휘하였고 사람들은 납세 거부 운동을 벌였습니다. 결국 영국 의회는 인지세법을 폐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영국은 인지세법을 폐지했지만 식민지에 대한 간섭을 끝낼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1767년 이번에는 식민지 사람들이 구입하는 영국 상품 중 흑연과 페인트, 차 , 종이 등에 무거운 세금을 매기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식민지 사람들은 이 법을 처음 낸 찰스 타운센드의 이름을 따서 타운센드 법이라고 불렀습니다. 타운센드 법은 식민지에 대한 영국의 권위를 세우고 세금을 마련하기 위해 제정된 법으로 식민지 의회를 일시 정시시키고 식민지가 내야 할 세금을 엄격하게 정했습니다. 이에 식민지 사람들은 영국 상품을 사지 말자며 거세게 대항하였습니다. 결국 분노한 보스턴의 시민들과 영국군이 충돌하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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