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구파 사림파 임사홍 조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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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구파 사림파 임사홍 조광조

이극돈은 훈구파였고 김일손은 사림파였습니다. 이극돈은 훈구파에서 높은 자리에 있던 유자광을 찾아갑니다. 유자광 역시도 사림파를 무척 싫어합니다. 자신을 무시했던 사림파의 대목 김종직이 이미 죽고 없지만 죽어서도 그에 대한 원한을 가지고 있던 유자광이었습니다. 이극돈에게 '조의제문'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유자광은 연산군에게 곧장 찾아갑니다. 그리고 사림파 김종직이 세조를 비난하는 글을 썼다고 일러발치게 됩니다. 연산군은 평소 사림파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김일손을 비롯한 많은 사림파를 능지처참하거나 귀양을 보내버리고 맙니다. 이미 죽은 김종직의 무덤을 파헤져 그 시체의 목을 베는 끔찍한 형벌까지 내리게 됩니다. 이렇게 사림파와 훈구파 사이에서 일어난 첫번째 사화를 무오사화라고 합니다. 무오사화의 승리는 훈구파였습니다.

 

훈구파 사림파 임사홍 조광조



무오사화로 인해 사림은 모두 사라지고 맙니다. 연산군 주변에는 연산군의 비위를 맞추고 연산군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 늘어놓는 훈구파만 남았습니다. 연산군은 나랏일은 보지도 않고 흥청망청 놀기만 합니다. 경연을 없애고 성균관을 유흥장으로 만들어버립니다. 학문은 당연히 게을리 하고 사간원과 상소 제도를 없애서 신하들과의 소통까지도 거부하고 맙니다. 사간원이란 임금에게 옳지 못하거나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말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입니다. 임금의 행동과 생각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기에 임금의 잘못을 지적해주던 기관이 사간원입니다. 그런 사관원이 사라져버리다니, 독불장군이 되어가는 과정이 되겠습니다. 임금이 명령을 내릴 때에는 먼저 사간원에서 이를 논의하였습니다. 아무리 임금이 내린 명령이더라도 적당하지 않다면 사간원에서는 이를 돌려보내고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사간원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연산군은 전국에서 기생을 뽑아 잔치를 베풀었고 기생을 양성하기까지 했습니다. 마음에 드는 사대부 여인들을 강제로 끌어오게 하였으며 도성을 기준으로 30리 안에 있는 백성들의 집을 모두 빼앗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일대를 자신의 사냥터로 만들었습니다.



연산군은 점점 삐뚤어져 갔습니다. 자신을 헐뜯는 한글 투서자 붙자 한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막았고 심지어 한글로 쓰여진 모든 책들을 불사르게 했습니다. 자신이 흥청망청 노느라고 써버린 나랏돈을 보충하기 위해서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내게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훈구파는 연산군에게 듣기 좋은 소리만 하고 있었습니다. 일은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나랏돈이 부족해지자 연산군은 훈구파들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으려고 합니다. 그동안 연산군에게 아첨만 하던 훈구파의 반발이 드디어 시작됩니다. 훈구파와 연산군의 사이가 벌어지는 것에 눈에 보이자 그 틈을 타고 들어간 간신 임사홍이 있었습니다. 임사홍은 두 아들을 예종과 성종의 부마(임금의 사위, 즉 성종의 아들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 보내는 것)로 만들만큼 권력에 욕심이 무척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임사홍은 이 틈을 놓칠 수 없었습니다. 훈구파와 연산군의 사이가 멀어지고 있으니 이를 이간질하여 훈구파를 조정에서 몰아낼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림은 이미 쫓겨나고 없으니 훈구파도 쫒겨나면 자신이 혼자서 권력을 독차지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임사홍은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가 성종의 후궁이었던 정씨와 엄씨의 모함으로 사약을 받고 죽었다는 것을 연산군에게 알립니다.  그동안 어머니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해 모르고 있었던 연산국은 이 사실을 알고 난 후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복수를 해야했습니다. 모함으로 사약을 받고 죽은 자신의 생모인 윤씨에 대한 복수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연산군은 부왕이었던 성종의 후궁 정 귀인과 엄 귀인을 죽이고 맙니다. 정 귀인이 낳은 안양군, 봉안군까지도 죽였으며 할머니인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죽게 만듭니다.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윤필상, 김굉필 등 신하 수십명을 사형시켰습니다. 그냥 자신의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닥치는대로 죽여버렸습니다. 항명회 등 이미 죽는 자는 시체의 목이 베이는 형벌까지 당하게 됩니다. 자신의 생모인 윤씨를 왕후로 복위시키고 아바마마 옆에 능을 만들라고까지 명령하게 됩니다. 무오사화 때 살아남은 사림파는 이때 또 희생됩니다. 이를 갑자사화라고 하고 1504년에 일어났습니다.



연산군의 폭정 그리고 방탕한 생활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게 됩니다. 신하들은 아부만 열심히 하게 됩니다. 물론 일부 뜻있는 신하들은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탄식을 하게 됩니다. 임금이 해도해도 너무하오,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에 닿았고, 더이상 임금이 아닌 폭군이오. 훈구파에서 뜻을 모은 박원종, 성희안 등은 연산군을 몰아내기로 뜻을 보으게 됩니다. 1506년 9월 1일 밤이었습니다. 뜻을 모은 훈구파들은 군사를 일으켜 간신이었던 임사홍 일파를 먼저 제거하였습니다. 연산군은 강화도로 쫒아내고 성종의 둘째 아들이었던 진성대군을 새 왕으로 추대하게 됩니다. 그가 곧 중종이고 이 정변을 중종반정이라고 합니다. 때는 1506년이었습니다.



중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훈구파의 도움이 맞습니다. 그래서 왕권은 약하고 훈구파 공신들의 권력이 지나치게 강해지고 있었습니다. 중종은 훈구파를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게 됩니다. 유교 정치를 복구하려면 먼저 성리학을 장려하고, 그동안 화를 입은 사림들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를 지켜보던 훈구파들은 탐탁치 않습니다. 누구 덕에 왕이 되었는데 딴 곳으로 마음을 쏟고 있는지, 재주는 곰이 부르기 돈은 누가 챙긴다더니 하는 불만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중종은 훈구파 공신들의 반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림파를 등용하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 잡고 유교 정치를 회복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때 등용된 대표적인 인물이 잘 알려진 조광조입니다. 조광조는 1482년에 태어나 1519년에 생을 마감하였으므로 오리 살지는 못했습니다. 조광고는 김종직의 제자였던 김굉필 문하에서 공부한 성리학자입니다. 사림파를 이끌고 있었으며 조정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하고 있었습니다. 조광조는 개혁 정신이 매우 강한 사람으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강직하였고 깊고 풍부한 학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종 역시도 조광조의 이런 성품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했습니다. 중종은 조광조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여러가지 정치 개혁이 추진되게 됩니다.



먼저 조광조에 의해 실시된 관리 채용제도가 있는데 이를 현량과라고 합니다. 전국에서 한문에 밝고 덕행이 높은 후보자를 추천하여서 예조에 보고합니다. 그 후에 왕이 직접 근정전에 나가 시험을 치르게 됩니다. 후에 관리를 선발하는 것이 현량과입니다. 조광조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왕도 정치를 실현해야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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