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공원
민족 정신을 높여주었던 황성신문, 부녀자들이 좋아했던 제국신문도 있습니다. 먼저 민족 정신을 높인 황성신문은 1898년에 낭궁억과 같은 유학자들이 모여서 창간했고 한글과 한문을 섞어서 발행하였습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사설을 실었으나 1910년에 페간되었습니다. 1898년에 이종일이 창간한 제국신문은 순한글을 사용하였기에 하층민과 부녀자들이 좋아했던 신문이었습니다. 이것도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1910년에 페간되고 말았습니다. 황성신문은 남자들이 많이 읽어서 수신문, 제국신문은 여자들이 많이 읽어서 암신문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일본에 맞섰던 대한매일신보가 있습니다. 1904년에 영국인 기자였던 베델이 발행인이 되었고 양기탁도 함께 창간하였습니다. 영국인이 발행인이라는 점에서 다른 신문에 비해 일제의 탄압을 덜 받을 수 있었고 황무지 개간권 반대, 국채 보상운동을 주도할 수 있었던 중요한 신문입니다.
하지만 1910년 나라를 완전하게 빼앗기게 되면서 경영권은 일본으로 넘어가고 일본은 이를 매일신보로 바꾸게 됩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한 학교와 교육 단체의 활동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19세기 말, 개화 운동과 함께 시작된 근대 교육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서 나라를 지키려는 의식이었고 애국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물밀듯이 들어오는 새로운 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는데 이는 선교사와 민족 지도자들이 근대학교를 세웠고 정부도 교육 입국 조서를 반퐇서 학교를 세우는 데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나라의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이고 익혀야 한다는 생각이 사회 구석구석으로 퍼지게 되면서 조선 사회 전반에도 많은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전국에는 새로 세워진 여러 학교들이 있었습니다. 1883년 함경도 덕원 주민들과 관리들은 힘을 보아 원산 학사를 세웠습니다. 정부에서도 통역관을 기르기 위해 동문학이라는 근대학교를 설립하였고 1886년 미국에 다녀온 민영익은 육영 공원을 설립하게 됩니다. 육영 공원은 양반 자제들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영어와 수학, 정치, 지리 등을 가르치는 학교였습니다.
육영 공원은 오직 양반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조선으로 들어온 선교사들도 사립 학교를 세웠습니다. 1885년 아펜젤러는 집 한 채를 빌려 작은 교실을 만들었고 처음 두 어린이를 가르치는 것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이 학교가 바로 배재학당이 되었습니다. 스크랜턴 부인은 1886년에 한 여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이화 학당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1887년에 학생들이 늘어나자 나라에서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선교사들은 여성 교육 기관이 없던 때에 여학교를 세워서 안방에 갇혀 지내던 여성들을 바깥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선교사들은 신학과 함께 역사와 지리, 물리, 화학 등 근대 학문을 가르쳐서 서양 문화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화학당을 만든 스크랜턴 부인은 1885년 의료 선교사인 아들을 따라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여성 교육에 뜻을 두고 1886년 우리 나라 최고의 여학교를 설립하게 됩니다. 이제 중전은 '이화'를 학교 이름으로 지어주었고 배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여성의 올바른 태도와 순결함, 명랑함을 상징하는 이름이었기에 스크랜턴 부인도 무척 좋아하였습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는 정부는 교육을 통해 나라를 다시 일으키자는 뜻으로 1895년에 교육 입국 조서를 반포하게 됩니다. 소학교와 사범학교, 외국어 학교를 만들고 1899년에는 중학교와 의학교, 농업, 상업, 공학교까지 만들게 됩니다. 학교를 세우고 인재를 길러 나라를 다시 일으키고자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의술을 익혀 의사가 되거나 농민도 선진 기술을 배워야 했으며 교육열이 날로 높아지는 시기였습니다. 무너져 가는 조국을 일으키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배움이라고 주장하는 민족지도자들이 많이 등장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인물로 신채호를 꼽을 수 있는데요 1880년 ~ 1936년까지 살았던 독립운동가면서 사학자, 언론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민족 지도자들은 팔을 걷어 붙이고 학교를 세워서 어린이들을 교육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특히나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지게 되자 애국 계몽 운동은 더욱 활발해지게 되었습니다. 학교수가 급증하게 되었고 애국심을 키워줄 수 있는 교과서들도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신채호 선생의 강의만 들으면 가슴이 뛴다는 청년들이 많아졌고 역사의 주인공으로 기억되어야겠다는 청년들도 많아졌습니다. 당시 대표적인 사립학교로는 대성학교와 오산학교가 있었는데 학교가 점점 늘어나게 되면서 전국에 있는 학교의 수는 수천개에 이르게 됩니다. 이에 일본은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은 1908년 사립학교령을 내리게 되는데요 이는 학교를 세울 때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만 했고 교과서도 교육 관청의 심사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일본이 학교를 세우는 것과 교육에 대해 이토록 반대를 하였던 것은 무엇일까요? 교육을 통해서 조국의 암담한 현실을 알게 되고 애국심이 높아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905년은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긴 해입니다. 일본의 침략이 심해지게 되자 민족 지도자들은 교육으로 나라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전국에 많은 학교를 세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정치활동을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교육 운동을 통해서라도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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